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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뽀리 상대주의 과학관을 변호함 - 『지적 사기』의 과학주의를 넘어 2005/03/03 01:30 by thiva

서평 / 상대주의 과학관을 변호함 - 『지적 사기』의 과학주의를 넘어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2000년 7월 1일
  1. 지적 사기』의 도전과 이에 대한 문제 제기
  2.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과 상대주의 과학철학의 ‘미국식’ 결합
  3. 상대주의에 대한 오해와 이해
  4. 진리와 객관성의 문제
  5. 실재와 과학 이론, 실험을 통한 검증
  6. 결론: 과학과 인문학의 거리 좁힘을 위하여
  7. 각주 내용

지적 사기』의 도전과 이에 대한 문제 제기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의 『지적 사기: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는 미국·프랑스·영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고, 지식인 사이에서도 화제의 대상이었다. 『지적 사기』에 대한 서평은 극에서 극을 달렸지만, 철학자들은 주로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철학자 이진우가 “현대 과학의 오만”을 지적하면서도 조금 신중한 입장을 취했음에 비해,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이정우는 이 책을, 명성을 얻으려고 씌어진 “희대의 사기극”이라 평가하면서, 이를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같은 유의 책들과 동일선상에서 읽어야 한다”고 비난했다.2)
흥미로운 사실은 『지적 사기』의 주장에 동조한 사람들 대부분이 한국 지식 계층 일부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를 덧붙였다는 것이다. 과학사학자 임경순은 “역사는 소칼의 발언을 현실로 바꾸고 있다”고 소칼과 브리크몽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동양과 서양 과학을 넘나들며 “대가를 자처하는” 한국의 “큰 이야기꾼”들이 “프랑스 철학자들이 소칼에게 당한 수모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첨가했다. 진중권도 90년대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수용에 대해 논하는 글에서 『지적 사기』를 언급하면서, “소칼의 주장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제가 팔아먹은 상품을 헐뜯는 자에게 보내는 지식 소매상의 히스테리 수준”이라고 국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렸다.3)
여기서 보듯이 『지적 사기』라는 텍스트는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 분석철학자와 대륙 철학자(주로 미국의 경우), 절대주의자와 상대주의 사회구성주의자, 과학자와 인문학자, 분석철학자들과 소위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들(프랑스의 경우)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갈등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 중 일부에 의해 이 책이 ‘이용’되면서, 이런 갈등과 차이를 증폭시켰다. 텍스트가 ‘나름대로의 삶’을 가지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지만, 문제는 이런 시끌벅적한 상황 속에서 『지적 사기』라는 책 자체를 진지하게 분석한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사실 『지적 사기』에는 이런 진지한 검토를 거부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이 책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과 20세기 상대주의 과학철학과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에 대한 비판을 함께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상이한 두 분야를 다 잘 알기 전에는 이 책을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소칼과 브리크몽이 무엇보다 라캉, 크리스테바, 들뢰즈, 가타리 등의 철학 전반이 아니라 이런 철학자들이 자연과학을 남용한 부분에만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프랑스 철학 전반을 이해하지 못하고 책을 썼다는 식의 일반론적인 비판도 별로 유효하지 못하다. 또 『지적 사기』를 읽다 보면 몇몇 프랑스 철학자들이 과학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이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했다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동의해도 아직 몇 가지 문제가 남는다. 왜 소칼과 브리크몽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자연과학을 ‘남용’한 경우와 상대주의 과학철학과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을 함께 비판하고 있는가? 이들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이고, 이 둘을 같은 차원에서 비판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이들이 ‘상대주의 과학철학’이라고 뭉뚱그린 포퍼, 쿤, 파이어아벤트P. Feyerabend, 에든버러 학파의 과학사회학, 라투르Bruno Latour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가? 이러한 분석이 과학과 철학에 대한, 자연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이 글은 상대주의 과학철학에 대한 소칼과 브리크몽의 비판을 다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통해 ‘상대주의적인 과학관’을 변호하기 위해 씌어졌다. 본론에서는 과학의 진리·실재·객관성과 같은 문제를 20세기 과학사·과학철학·과학사회학의 성과 위에서 논의하고,4) 이것이 『지적 사기』에 나오는 과학의 모습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검토할 것이다. 결론에서는 『지적 사기』가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문화의 바람직한 상호 작용을 위해 우리에게 던지는 함의가 무엇이고, 그 한계가 무엇인지 살펴봄으로써, 이 책의 의미에 대한 한 가지 평가를 시도해볼 것이다.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과 상대주의 과학철학의 ‘미국식’ 결합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지적 사기』의 제4장은 「간주곡: 과학철학의 인식론적 상대주의」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pp. 76∼143). 소칼과 브리크몽의 정의에 따르면, 인식론적 상대주의란 존재하는 것 또는 존재한다고 주장되는 것에 대한 어떤 진술의 진위가 개인이나 사회적 집단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하는 주장을 의미한다(p. 78).5) 소칼과 브리크몽은 흄의 “과격한 회의주의,” 포퍼의 반증 가능성, 듀엠-콰인Duhem-Quine 테제, 쿤의 패러다임과 공약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파이어아벤트의 아나키즘, 에든버러 학파의 스트롱 프로그램Strong Program, 그리고 브루노 라투르를 상대주의 철학의 예로 들고,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비판에는 이유가 있다. 소칼과 브리크몽은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난맥상”(p. 35)으로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쿤, 포퍼,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철학, 에든버러 학파, 라투르의 과학사회학이 『지적 사기』의 타깃인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사고의 난맥상을 만드는지 분명하지 않다. 상대주의 과학사회학의 에든버러 학파는 물론, 과학사회학의 한 학파를 이룬 프랑스의 라투르에서조차 라캉, 들뢰즈 등 소위 프랑스 포스트모던 철학의 영향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 역의 영향도 거의 없다.6) 이들 생각에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과학과 관련해서 구미에 가장 널리 알려진 프랑스 철학자는 미셸 푸코이고 푸코가 바슐라르와 캉귀엠G. Canguilhem의 ‘프랑스’ 과학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쿤이나 에든버러 학파에 미친 영향은 거의 없거나 아주 미미하다. 라투르는 푸코에 대해 비판적이고, 더욱이 푸코는 소칼과 브리크몽이 비판의 대상에도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프랑스 철학과 상대주의 과학철학을 몰아서 논의하고 비판하는 것은 ‘미국적인’ 컨텍스트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는 다문화주의 정책과 교육을 비판하는 보수적인 지식인과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문화 전쟁Culture Wars’이라고 불리는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다문화주의의 철학적 배경 중 하나가 인종·성·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적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인데, 이를 비판한 사람들은 이것이 대학 커리큘럼에 침투해서 합리성과 진리를 가르쳐야 하는 대학 교육을 붕괴시켰고, 너도나도 다 옳다는 식의 인식론적 아노미를 가속화시켰다고 주장했다. 앨런 블룸처럼 이런 얘기를 하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로크와 ‘개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의 사상에 근거한 미국의 철학과 정치 사상은 원래 합리적이고 건전한 것인 데 반해, 지적 ‘타락’의 근원인 상대주의는 외국 이론과 철학에서 유입되었다는 생각이었다. 『미국 정신의 종말』에서 블룸은 독일의 니체 철학과 막스 베버를 지목했지만, 분석철학자인 존 설은 푸코와 데리다 등을 뭉뚱그린 프랑스 ‘포스트모던 철학’으로 그 화살을 돌렸다. 특히 설은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 철학이 쿤과 로티R. Rorty의 상대주의 과학철학과 결합하면서 미국 대학의 인문학 교육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7)
이런 ‘문화 전쟁’의 쟁점이 1994년 이후 ‘과학 전쟁Science Wars’에 직수입되었다.8) 과학 전쟁에 불을 붙인 『고등 미신』을 저술한 과학자 그로스P. Gross와 레빗N. Levitt은 여기서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스트, 라투르 같은 과학사회학자, 페미니스트 인식론, 급진적 환경론자, 창조론자, AIDS 활동가를 ‘반과학anti-science’으로 싸잡아서 비판했다. 이들의 책과 주장은 패러디 논문을 구상하던 소칼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소칼의 날조 논문이 겨냥한 타깃은 과학적 진리를 무시한다고 간주된 미국의 상대주의자·비실재론자 인문학자들이었지만, 프랑스 철학자들의 의미없어 보이는 과학 이야기들은 이를 위한 좋은 패러디 소재를 제공했다. 이 패러디를 바탕으로 소칼은 브리크몽과 함께 『지적 사기』를 저술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책이 프랑스에 대한 외국인의 혐오나 편견을 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이들의 책은 ‘미국의’ 건전한 정신을 오염시키는 ‘외국의 나쁜 철학’을 골라내고 이를 소독해내려는 1980년대 이후 지속된 지적 전통의 연속선 위에 있었다. ‘나’와 ‘너’를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전통 속에서는 프랑스 철학자들 사이의 미세한 차이는 물론, 프랑스 철학과 상대주의 과학철학의 차이는 너무도 쉽게 무시되었던 것이다.

상대주의에 대한 오해와 이해

소칼과 브리크몽의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기 전에, 이들이 우선 상대주의를 의미있게 정의하고, 범주화했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저자들이 철학에 대해 전문 지식이 없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칼 포퍼를 상대주의자로 분류한 것은 동의하기 힘들다. 물론 포퍼는 과학이 ‘절대’ 진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니며, 오히려 이런 절대주의를 경계했다. 그렇지만 그는 과학/비과학의 너무도 선명한 경계와 과학의 진보를 확신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반증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가 생각한 과학의 핵심이었고, 반증이 되기 때문에 과학에는 진보가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9) 포퍼가 절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상대주의자로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소칼이나 브리크몽조차 과학은 ‘진리에 근접한 것approximately true’(p. 85)이라고 토를 달고 있음을 볼 때, 포퍼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공정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상대주의 과학철학이나 과학사회학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이해보다 오해가 많고, 소칼과 브리크몽은 이런 오해를 여러 곳에서 되풀이한다. 상대주의자들이 원자와 같은 과학적 실재scientific reality의 존재를(심지어 눈에 보이는 돌멩이나 박테리아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든지, 진리를 깡그리 부정한다든지, 아니면 진리/거짓, 과학/이데올로기를 구별하는 아무런 기준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 등이 이런 오해의 예이다. 이런 얘기는 상대주의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물론 상대주의자들은 하나의 (자연) 현상에 대해 두 가지 이상의 이론이나 설명이 가능하고,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둘 다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여럿일 수 있고 또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고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구별하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기준이 역사적·사회적으로 형성되고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상대주의자들은 인간과 무관한 진리나 객관성objectivity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객관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주의자들에게 객관성이란 것은 견고하고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합의된 ‘상호 주관성intersubjectivity’인 것이다. 과학이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진보의 기준이 패러다임에 따라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들은 과학의 역사에 근거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과 과학 혁명론이 함축하는 결론들이다. 쿤은 이론의 선택 기준이나 과학적 증거들이 과학 내적인 요소에 단순성이나 미적 요소 같은 철학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에든버러 학파는 이것들이 사회 문화적 요소를 포함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점을 놓고 쿤은 에든버러 학파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10)
분명히 상대주의자들은 과학자들이 ‘실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있다. 몇몇 과학자들에게는 이런 회의적인 태도가 반과학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이 IQ(지능 지수)라고 정의하고 또 측정하는 것은 자연(인간)에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과학자들이 구성해내고 합의한 ‘사회적 구성물’인가? ‘범죄 유전자criminal gene’를 찾으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은 가치 있는 것인가? 상대주의는 이런 문제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하고, 이런 비판적인 태도는 과학주의에 대한 해독제로서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또 과학에 등장하는 존재자entity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상대주의 철학자들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보편 중력이란 ‘힘’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는 뉴턴에 반대하던 과학자들은 물론 뉴턴주의자들까지 수많은 과학자들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문제이고, 시공간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는 칸트가 골똘히 생각했던 문제이다(칸트를 상대주의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에테르ether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부정하면서 아인슈타인은 고전 물리학의 벽을 깼고, 슈뢰딩거 방정식에 나오는 파동 함수가 실재인가라는 문제는 양자물리학자들을 화해할 수 없는 두 그룹으로 나눴던 문제이다. 특히 에테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존재하던 모든 과학적 존재scientific entity 중에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혀진 것이 꽤 있듯이, 지금 과학자들이 실재라고 믿고 있는 것 중에 그렇지 않은 것으로 판명이 날 수 있는 것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와 객관성의 문제

그렇지만 과학지상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인간을 초월한 ‘절대 진리’나 객관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또 이런 비판은 분명히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예를 들어보자. 2+3=5라는 보편을 이용해서 외계인의 메시지를 해독하는 영화 「콘택트Contact」의 플롯이 설득력 있듯이, 대수와 논리logic는 이런 객관적 진리가 아닐까? 원의 접선과 접점을 지나는 반지름이 이루는 각이 90도라는 것도 인간을 초월해서 보편적으로 타당한valid 진리가 아닐까? 이런 예는 끊임없이 나올 수 있다. 지구가 둥글고 자전하며 공전한다는 것은? 진공 속에서 물체의 낙하 속도가 같다는 것은? 수소 분자 두 개와 산소 분자 하나가 결합해서 물분자 두 개를 이룬다는 명제는? 지구와 태양 사이에 중력이라는 힘이 존재하고, 이것이 지구를 태양 주위로 타원 운동하게 한다는 것은? 이렇게 과학이 진리와 객관성의 지평edge of objectivity을 점차 확대하는 인간의 실천이라면, 여기 상대주의가 설 땅이 있을까?
그렇지만 이런 비판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고찰해봄으로써 과학에 대해 조금 더 균형 잡힌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첫번째는 이런 질문들 자체의 ‘역사성’이다. 갈릴레오의 역학을 생각해보자. 진공 속에서 모든 물체가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갈릴레오의 법칙과 진공 펌프를 이용한 이 실험적 검증은, 마찰이 없는 공간이라는 추상적인 기하학적 공간이 물리학에 의미가 있다는 것the geometrization of space을 인정하고, 펌프를 사용해서 실험실에서 만든 인공artifact으로서의 진공이 ‘자연’철학의 타당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참이다. 17세기 유럽의 과학 혁명은 바로 이런 새로운 ‘인식의 틀’이 도입된 시기였다.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에 의해 자연을 수학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플라톤주의가 부활되었고, 프랜시스 베이컨과 로버트 보일 등은 기기instruments를 통해 자연에 개입하고 이런 개입이 낳은 현상(소위 제2의 자연)이 자연철학의 훌륭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방법론을 새로운 과학의 기초로 정립시켰다. 과학 혁명기에 나타난 수많은 논쟁과 갈등은 이러한 새로운 인식의 틀을 받아들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논쟁이었다.11) 이러한 인식 틀은 이제 대부분의 과학자들에게 상식과도 같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의 출발은 국소적이었고 우연적이었으며, 수많은 사회 문화적, 기술적 요소와의 네트워크 속에서 만들어졌다. 최근 과학사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는, 어떻게 이런 국소적·우연적 인식 틀이 보편적으로 객관적인 것으로 빠르게 자리잡아가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과정이다.12)
나는 위에서 ‘인식의 틀’이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Ian Hacking의 ‘사유의 스타일style of reasoning’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차이는 해킹은 자신의 스타일이 쿤의 패러다임을 대체할 수 있다고 보지만, 나는 스타일의 변화와 패러다임의 변화가 역사를 통해 중첩되어 나타난다고 본다. 쿤의 패러다임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소멸과 생성의 과정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지만, ‘인식의 틀’ 또는 ‘스타일’은 역사를 통해 축적된다. 즉, 한번 지배적으로 정착된 스타일은 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하학적 스타일(고대 그리스), 실험의 스타일(17세기), 통계적 스타일(19세기)과 같이 한번 확립된 스타일은 아직도 굳건하게 남아 있으며, 따라서 현재의 과학은 과거의 과학보다 더 다양한 스타일과 이로부터 파생한 더 많은 연구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더 많은 설명과 예측을 얻어내고, 자연에 더 깊이 개입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선명한 과학의 진보를 볼 수 있다.13)
새로운 인식의 틀 또는 스타일이 만들어지는 시점은 대개 쿤이 과학 혁명기라고 부르는 시점과 겹치기도 하는데, 쿤의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스타일을 받아들인 과학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대화의 불능’이 존재한다.14) 한쪽에서는 명백하게 참인 명제가 다른 쪽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대화의 불능’이 영구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나 스타일이 안정된 것으로 수용이 되고 나면, 과거의 과학 체계의 대부분이 새로운 과학의 하부로 편입되면서(뉴턴 역학이 상대론의 특수한 경우로 해석되듯이) 새로운 과학의 특수한 경우로 해석된다. 이런 편입과 재해석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세대의 과학자들에게 ‘대화의 불능’은 소멸한다. 지금 물리학도들은 왜 로렌츠H. A. Lorentz 같은 19세기 최고의 이론 물리학자가 뉴턴의 세계관과 상대론을 끝내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두번째로 생각해볼 문제는 과학의 법칙·모델·방정식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뉴턴의 법칙과 보편 중력universal gravitation의 존재를 ‘절대 진리’라고(또는 이와 흡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도 18세기와 19세기를 통해 ‘뉴턴의 법칙’은 과학적 법칙의 대명사로 간주되어왔다. 뉴턴이 이 법칙들을 발견한 과정을 살펴보자. 17세기 초엽, 천문학자 케플러는 태양계 행성의 공전 궤적이 타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어 뉴턴은 화성과 같은 행성의 궤적이 타원이라면 화성과 태양 사이에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보편 중력)이 존재한다는 것을(그리고 또 역으로 이런 힘이 태양과 화성 사이에 존재하면 화성은 타원 운동을 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가속도와 힘의 관계를 정형화했고(f=ma, 제2법칙), 미적분이라는 새로운 수학적 기법을 발전시켰다. 뉴턴의 업적을 놓고 칸트는,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무한한 자연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알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에는 빠진 것이 있다. 그것은 뉴턴의 보편 중력이란 개념이 수많은 사람에게 골칫거리였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중력이 물질에 내재하며 매질이 필요 없다는 입장과 힘이 매질을 통해 전파된다는 서로 다른 견해가 오랫동안 공존했다. 프랑스의 달랑베르J. R. d’Alembert, 라그랑주J. L. Lagrange 같은 수학자와 영국의 해밀턴W. R. Hamilton, 켈빈 경Lord Kelvin 같은 물리학자는 아예 뉴턴의 역학에서 힘을 제거한 새로운 역학 체계를 만들었다. 해밀턴과 켈빈은 힘 대신 에너지 개념을 사용했는데, 힘과 에너지의 존재론적인 성격에 모두 만족하지 못했던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는 ‘숨은 질량hidden mass’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새로운 역학 체계를 제시했다. 20세기 초엽에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보편 중력이란 ‘힘’을 물질이 존재하는 4차원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설명하는 일반 상대론을 내놓았는데, 이에 의하면 ‘중력’이라는 것은 물질과 시공간의 ‘효과’로서 그 존재론적인 층위가 뉴턴이 상정한 그것과는 상당히 달라졌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일반 상대론을 진리로 받아들이지만, 지구와 달 사이에 중력이 존재한다는 얘기 또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위에서 지적했지만 뉴턴의 중력과 운동 법칙은 케플러의 법칙―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의 궤적이 타원이라는―에서 유도되었다. 그런데, 케플러의 법칙 자체가 근사치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행성의 궤도는 수학적인 타원이 아니라 타원에 아주 근접한 것이다. 뉴턴이 수학을 사용해서 깨끗하게 해결한 문제는 마찰도, 다른 물체에 의한 영향도, 전자기력 같은 다른 종류의 힘도 없는 이상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두 물체’의 운동이다. 태양계와 같이 다체(多體)로 구성된 실제 세계가 이런 이상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두 물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데는 놀랄 만한 힘을 보여주는 뉴턴 역학은 다체 문제로 가면 놀랄 만큼 무력하다. 18세기 이래 라그랑주, 라플라스P. S. de Laplace, 푸앵카레J. H. Poincar와 같은 최고의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이 3체 문제three-body problem와 같은 다체 문제를 뉴턴 역학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모델이나 이 모델에 적용되는 방정식은 ‘실재’와 연관이 있지만, 동시에 거리를 두고 있다. 모델과 방정식 모두 인간의 사유가 만들어낸 ‘구성물’이기 때문이다.15)

실재와 과학 이론, 실험을 통한 검증

그렇지만 아직도 차이는 존재한다. 실재론자-과학자들realist-scientists은 과학 이론이 ‘실재’에 대해 무엇인가 얘기해주고 있다고 본다. 물리학자 프리맨 다이슨도 이 점을 들어 이론과 모델을 구별한다. “이론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기술해준다고 상정된, 논리와 수학으로 만들어진 구성물이다. 이론은 그것의 예측과 실제 세계의 관찰을 비교함으로써 테스트될 수 있기 때문에 유효하다.”16) 소칼과 브리크몽은 양자 전기역학의 놀랄 만한 예를 증거로 제시하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전자의 자기 모멘트의 값이 (오차의 한계 내에서) 1.001 159 652 201이고, 실험을 통한 측정값은 1.001 159 652 188라는 것이다. “만일 과학이 이 세계에 대해 아무런 진실―또는 진실에 근접한 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면, 이론과 실험의 이런 일치는 기적으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이들은 “우리가 자연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정말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p. 85).
과학철학자들은 실험을 통한 이론의 검증verification이라는 것에 대해 소칼과 브리크몽보다 훨씬 회의적이며, 다수는 검증을 통한 과학적 명제의 확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주장은 과학사에 비추어볼 때 일리가 있다. 톨레미Ptolemy의 ‘틀린’ 지구 중심설은 천문 현상의 검증을 거쳤으며, 더욱이 ‘쏘아올린 화살이 제자리에 떨어진다는’ 실험과도 부합되었다. 빛이 파동이라는 주장은 수많은 실험 결과를 통해 검증된 것처럼 보였지만 아인슈타인에 의해 뒤집어졌다. 20세기 철학자들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일반화했는데, 듀엠-콰인 명제는 데이터에 근거한 증거가 이론이 참임을 보이는 데 항상 충분치 못함을 보여주었고 핸슨N. R. Hanson은 데이터와 증거 자체가 이론에 의존함을 주장했다. 여기에 ‘까마귀의 패러독스’나 ‘굿맨의 수수께끼’와 같은 논리적인 패러독스가 가세했다. 포퍼는 검증이라는 잣대를 포기하고 검증이 아닌 반증falsification과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을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는 새로운 잣대로 제시했다. 과학자는 대담한 가설을 던지고 그 가설은 반증이 될 때까지 참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쿤은 과학 이론이 쉽게 반증된다는 포퍼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과학 이론은 논리적 명제와는 달리 몇몇 반례 때문에 포기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대담한 가설을 던지는 일이나 이를 반증하려는 노력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과학적 세계관의 틀(패러다임) 속에서 제기된 문제를 풀고puzzle solving 그럼으로써 이 틀을 완벽히 하려고 노력한다고 주장했다.17) 실재를 기술하는 이론이 실험을 통해 입증됨으로써 우리에게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사람은 쿤과 같은 철학자만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물리적 세상이 실재한다’는 명제는 내게는 본질적으로 ‘물리적 세상은 꼬끼요’라고 하는 것 정도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실재하는 것’은 내게는 본질적으로 공허한, 의미없는 범주이다”라고 하면서, “물리학자들은 결코 그들의 그림을 실재하는 메커니즘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며, 이런 비교의 의미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18)
그렇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런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논의가 과학의 진정한 모습과 거리가 있다고 본다. 검증이란 문제에 논리적으로 패러독스가 있다고 해도, 이론은 바로 이 순간에도 테스트되고 있고 세상에 대해 새로운 이해와 통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과학철학의 논의가 과학자들의 실천과 괴리가 있다는 주장에 부분적으로 공감하는데, 무엇보다 철학자들의 논의는 “과학이 이러이러하다”는 사실보다 “과학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규범’ 또는 ‘메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검증에 논리적인 패러독스가 있다고, 그것이 과학자의 실천을 가로막지는 않는다. 논리학에서의 귀납과 연역을 아무리 조합해도 과학자들이 높이 평가하는 설명이나 이론이 나오지 않듯이, 논리나 여타 철학적인 메타는 실제로 수행되는 과학과는 거리가 있다. 에든버러 학파나 라투르는 20세기 과학철학의 이러한 성향을 비판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과학’이나 ‘만들어지는 과학science-in-the-making’에 초점을 맞추어 과학사회학을 출범시켰다.19) 그렇지만 흥미있는 사실은 철학에 회의적인 과학자들이 이런 과학사회학을 환영하기는커녕, 이에 대해서는 아예 적대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회의와 적개심이 근거가 있는 것일까? 이 글에서 나는 실재·진리·객관성·과학의 진보에 대해 실재론자-과학자들과 상대주의 과학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의 차이를 길게 조명해봤는데, 이런 고찰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상대주의 과학철학,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이 결코 반과학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상식적인 결론이다. 이들은 과학의 역사성과 과학자 사회, 그리고 이들이 공유한 세계관과 오랜 시간을 거치며 정착된 다양한 방법론, 과학자들이 취사 선택한 증거와 판단을 실재론자-과학자들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을 뿐이다. 이들에게 과학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과학의 무력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동력원일 뿐이다. 상대주의자들은 반과학주의자들도 아니고, 지적 아나키스트도 아니며, 정치·사회적 정의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아니다. 상대주의 철학자나 과학사회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경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의 과장된 힘, 아니 과학을 가장한 힘인 과학 절대주의 또는 과학 지상주의이다.
대부분의 과학 연구가 시민의 세금으로 지원되는 지금, ‘위기’를 맞고 있는 (미국의 경우) 입자 물리학자들은 물론 게놈 프로젝트에 참여한 생물학자, 응용과는 거리가 먼 순수과학을 위해 연구비를 얻어야 하는 천문학자와 같은 자연과학자들 모두 과학의 인식론적·사회적 이미지와 위상에 큰 관심이 있다. 이런 과학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상대주의 과학철학과 과학사회학인가 아니면 과학의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다른 생각을 단죄하려는 과학 지상주의인가?20)

결론: 과학과 인문학의 거리 좁힘을 위하여

지금까지의 고찰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자연과학의 엄밀성과 ‘객관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얻어낼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지난 수천 년 간 서양의 자연철학과 수학, 그리고 과학의 발전을 통해 인간이 이해하고 통제하는 ‘세계’의 변경은 놀랄 만큼 확장되었다. 그리고 과학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서 국소적·우연적·사회문화적 배경에 기인한 해석의 차이의 영향을 최소화시키는 다양한 방법을 발전시켰고, 이를 과학자 사회의 규범으로 채택하고, 이에 근거한 포상 체계reward system를 확립하는 데 다른 어떤 영역보다 더 성공적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성과를 얻어낸 과학도 인간의 활동이고, 사회문화적인 컨텍스트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과학적 설명과 이론은 과학자들에 의해 취사 선택되고, 과학자 사회에 의해 평가되는데, 이런 선택과 평가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다양한 증거에 비추어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의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한다. 증거를 채택하는 과정과 그것의 설득력을 평가하는 과정에는 ‘판단’이 개입하고, 이는 100% 논리나 계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역사를 통해 축적된 ‘스타일’이나, 과학자 사회가 공유한 패러다임, 가치관, 그리고 기술적·사회문화적 요소와 같이 과학과 얽혀 있는 다양한 과학 외적인 요소가 과학 내적인 요소와 함께 영향을 미친다.21)
이러한 이해는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문화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네 개의 이미지―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인문학과 과학, 그리고 인문학자들이 보는 과학과 인문학―를 연결해주는 하나의 고리가 될 수 있다. 이 간극을 줄이는 또 다른 방법은 상대방의 지식이나 학문의 ‘상대성’을 얘기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자기가 하는 학문의 ‘상대성’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과학 지식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인문학자들은 자신의 지식도 마찬가지로 상대적일 수 있음을 인정해보고, 인간의 활동인 과학이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마찬가지로 인간의 활동인 인문학에도 객관적인 영역이 꽤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보는 식이다. 이런 반성은 결국 과학과 인문학 모두에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부분과, 해석이나 판단이 개입해서 상호 주관성이 강한 부분이 정도의 차이를 두고 혼재해 있음을 드러낼 수 있다.
소칼과 브리크몽의 『지적 사기』는 이 점에서 아쉬움이 많다. 이들은 과학의 ‘남용’에 대해 너무 걱정한 나머지, 비록 과학자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과학의 역사와 기능, 그 철학적 본질과 사회적인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연구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뭉뚱그려서 비판하는 오류를 범했고, ‘남용’ 부분에 대해서도 왜 이들이 이렇게 과학을 ‘이용’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컨텍스트적인 고찰 없이 “학생의 잘못을 고쳐주려는 선생의 말투”를 고수했다.22)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한 인문학자들이 없지 않지만, 대다수의 인문학자들은 『지적 사기』에서 과학자들의 오만과 독선을 보았고, 과학자들에겐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쓸데없는 것이라는 편견을 근거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지적 사기』가 상대주의 과학철학과 과학사회학을 비판함으로써 더 벌려놓은 과학과 인문학의 사이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이 글을 썼는데, 아마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 부분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23) 분명한 것은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이를 “무시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는 재미있게 읽고 잊어버리면 되지만, 『지적 사기』는 당분간 합리적인 토론과 반론이 필요한 책이기 때문이다. ▨〔토론토 대학 교수(과학기술사)〕

각주 내용

1) 이 글의 초고에 대해 물리학자 한영덕 교수, 런던에서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이상욱님, 에든버러에서 과학사회학을 공부하는 김상현 박사가 값진 논평을 해주셨고, 이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2) 앨런 소칼Alan Sokal과 장 브리크몽Jean Bricmont, 이희재 옮김, 『지적 사기: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민음사, 2000. 중앙일보 2000년 2월 8일자와 한국일보 2000년 2월 1일자에 실린 이진우와 이정우의 서평.
3) 중앙일보 2000년 2월 8일자에 실린 임경순의 서평. 『한겨레 21』 3월 2일자에 실린 진중권의 「포스트모더니즘, 관념의 유희에 머물 것인가」. 지식인들에 대한 질타는 문화일보(1월 26일)와 동아일보(1월 29일)에 실린 기자들의 서평에도 드러나 있다.
4) 20세기 후반의 과학사회학에 대해서는 필자의 「과학사회학의 최근 동향: 사회구성주의, 과학적 실천, 포스트모더니즘」,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 기술』(문학과지성사, 1999), pp. 21∼67. 이영희, 『과학 기술의 사회학』(한울, 2000)을 참조.
5)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대한 소칼과 브리크몽의 정의에는 존재론적 상대주의와 주관주의가 혼재되어 존재한다. 철학적으로 상대주의는 절대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타낸다.
6)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필자와는 다른 각도에서, 『지적 사기』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글로는 Michel Callon, “Whose Imposture? Physicists at War with the Third Person,” Social Studies of Science 29(1999), pp. 261∼84. Alan Haworth, “Only One Cheer for Sokal and Bricmont: Or, Scientism Is No Response to Relativism,” Res Publica 5(1999), pp. 1∼21을 참조.
7) Allan Bloom, 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How Higher Education Has Failed Democracy and Impoverished the Souls of Today’s Students(Simon and Schuster, 1987). John Searle, “The Storm over the University,” New York Review of Books(6 December, 1900), pp. 34∼42; “Rationality and Realism, What is at Stake?” Daedalus 122(Fall, 1993), pp. 55∼83.
8) 1990년대 과학 전쟁에 대해서는 필자의 「누가 과학을 두려워하는가: 과학 전쟁의 배경과 그 논쟁점」,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 기술』(문학과지성사, 1999), pp. 68∼126을 참조.
9) 포퍼의 과학철학과 정치철학에 대한 간략하지만 흥미있는 최근 논의로는 M. Hacohen, “Karl Popper, the Vienna Circle, and Red Vienna,”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59(1998), pp. 711∼34가 있다.
10) 상대주의적 인식론에 대한 좋은 논의로 Barry Barnes and David Bloor, “Relativism, Rationalism, and the Sociology of Knowledge,” in Martin Hollis and Steven Lukes eds., Rationality and Relativism(MIT Press, 1982), pp. 21∼47; Barry Barnes, “How Not To Do the Sociology of Knowledge,” in Allan Megill ed., Rethinking Objectivity(Duke University Press, 1994), pp. 21∼35를 참조.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균형 잡힌 논의로는 Helen E. Longino, “Scientific Objectivity and the Logics of Science,” Inquiry 26(1983), pp. 85∼106을 볼 것. 필자의 「문화로서의 과학, 과학으로서의 역사: 쿤 다시 보기」,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 기술』, pp. 149∼70은 쿤과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차이와 공통점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11) Steven Shapin and Simon Schaffer, Leviathan and the Air-Pump: Hobbes, Boyle, and the Experimental Life(Princeton, 1985).
12) 예를 들어 Helen Longino, Science as Social Knowledge: Values and Objectivity in Scientific Inquiry(Princeton, 1990); Kenneth L. Caneva, “Objectivity, Relativism, and the Individual: A Role for the Post-Kuhnian History of Science,” Studies in the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29(1998), pp. 327∼44를 참조.
13) Ian Hacking, “Language, Truth and Reason,” in Martin Hollis and Steven Lukes eds., Rationality and Relativism(MIT Press, 1982), pp. 48∼66; “‘Style’ for Historians and Philosophers,”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23(1992), pp. 1∼20.
14) 쿤의 incommensurability는 (두 패러다임이나 이론 사이의) ‘공약 불가능’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나는 후기 쿤의 입장에 따라 이를 ‘대화의 불능’이라고 번역했다. 이에 대해서는 Xiang Chen, “Thomas Kuhn’s Latest Notion of Incommensurability,” Journal for General Philosophy of Science 28(1997), pp. 257∼73 참조.
15) 과학 법칙에 대한 해석은 Ronald N. Giere, Science without Laws(Chicago, 1999), pp. 84∼96에 의존했음. 3체 문제의 역사에 대해서는 June Barrow-Green, Poincar and the Three Body Problem(London: London Mathematical Society, 1997)을 참조.
16) Freeman J. Dyson, The Sun, the Genome, and the Internet: Tools of Scientific Revolutions(Oxford, 1999), p. xiv.
17) 검증의 문제와 20세기 과학철학에 대한 좋은 개설서로는 C. G. Hempel, Philosophy of Natural Science(Prentice-Hall, 1966); A. F. Chalmers, What is This Thing Called Science? 3rd edition(University of Queensland Press, 1999)이 있다.
18) 실재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Mara Beller, “The Sokal Hoax: At Whom are We Laughing,” Physics Today(Sept. 1998), pp. 29∼34 중, pp. 31∼32에서 인용했음.
19) 주 4)에 있는 문헌들 참조.
20) 이 질문에 대한 필자의 자세한 분석이 「20세기 과학의 패러독스: 과학의 힘과 권위에 대한 공중public의 인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과학과 철학』 제10집(1999), pp. 93∼123에 있다.
21) 과학 전쟁에서 나타난 실재론자-과학자와 사회구성주의자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로는 Philip Kitcher, “A Plea for Science Studies,” In A House Built on Sand edited by Noretta Koertge(Oxford: Oxford UP, 1998), pp. 32∼56을, “방법론적 구성주의”를 통해 사회구성주의와 실재론의 접합점을 만들려는 시도로는 Arthur Fine, “Science Made Up: Constructivist 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in Peter Galison and David J. Stump eds., The Disunity of Science(Stanford University Press, 1996), pp. 231∼54를 참조.
22) “학생의 잘못을 고쳐주려는 선생의 말투”라는 표현은 Michel Callon, “Whose Imposture? Physicists at War with the Third Person”(주 6)), p. 265에서 빌려옴.
23) 물리학자 머민조차 프랑스 철학에 대한 컨텍스트적인 고찰이 없다는 것이 『지적 사기』의 심각한 결점great failing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N. David Mermin, “Fashionable Nonsense,” Physics Today(April, 1999), 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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